서울아산병원 내분비내과 민세희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억눌렸던 해외여행 수요가 폭발하면서 연속혈당측정기나 인슐린 펌프를 착용한 당뇨인이 비행기를 타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하지만 기내식에 숨어 있는 탄수화물, 시차로 뒤죽박죽되는 생체리듬, 보안 검색대에서 느닷없이 받는 X-ray 요구 등 예상 밖 변수가 여행을 ‘혈당 스릴러’로 바꿔 놓기 십상이다. 그래서 기억해 둘 세 글자가 있다. 바로 3P: 떠나기 전 몸 상태를 점검하는 Plan(계획), 약과 기기를 여유 있게 챙기는 Pack(준비), 그리고 비행 중·도착 후 혈당을 지키는 Protect(보호)다. 이 세 단계를 따라가면 낯선 여행지에서도 혈당 걱정보다 설렘이 먼저일 것이다.
Plan (계획)
계획단계는 출발 한 달 전부터 시작된다. 담당 의료진과 공복혈당, 당화혈색소(HbA1c), 최근 저혈당 기록만 확인해도 여행 리스크를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때 ‘1형/2형 당뇨병, 인슐린 펌프 혹은 연속혈당측정기 사용, 저혈당시 글루카곤 필요 등의 정보가 명시된 영문 처방전 및 진단서를 받아 휴대폰에 PDF로 저장해 두면 세관에서 활용이 가능하다. 시차가 5 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은 시간을 늦춰가는 ‘동→서’엔 인슐린 투약간격이 길어져 고혈당 위험이 증가하므로 인슐린 용량을 20–30 % 정도 늘리고, 시간을 앞당겨가는 ‘서→동’엔 인슐린 투약 간격이 짧아져 저혈당 위험이 증가할 수 있으므로 같은 비율로 용량을 줄인 뒤 도착해 현지 시계에 맞춰 원래 용량으로 복귀하면 저혈당·고혈당을 모두 예방할 수 있다.
Pack(준비)
여행을 하루 앞두고 캐리어를 펼치면, 가장 먼저 인슐린과 주사침, 센서, 배터리를 평소 일주일치의 두 배로 넣는다. 이 약들은 영하 20℃까지 내려가는 수하물칸에서 얼어버리기 쉽기 때문에 손가방에 보관하는 것이 안전하다. 손가방 속 보냉 파우치에는 2~8℃를 지켜 줄 아이스팩 두 개 정도를 담고 파우치 겉면엔 ‘Thermo-Sensitive Medical Supplies’라는 표시를 붙여 불필요한 개봉을 최소화하며 동결과 과열을 동시에 예방한다. 공항 보안검색대에서는 “당뇨 치료기기가 있다”고 먼저 밝히고, “X-ray 대신 금속 탐지기나 손으로 하는 패트다운 검사를 원한다”고 요청할 권리가 승객에게 있다.
Protect(보호)
비행기에서 복도 측 좌석은 화장실 접근성을 높일 수 있다. 좌석 포켓에는 120 mL 주스나 포도당 젤(탄수화물 15 g)을 준비해 두면 안심이 될 것이다. 혈당이 70 mg/dL 아래로 떨어지면 ‘15 g 탄수 → 15 분 뒤 재측정’ 원칙으로 대응하고, 두세 시간마다 통로를 걸어서 혈액순환을 돕는다. 도착 후에는 기후 변화에 맞춰 인슐린을 냉장고나 쿨 파우치에 보관하고, 음식 사진을 앱에 기록해 탄수화물을 가늠하며 혈당 패턴을 남겨 두면 다음 여행이 한층 더 편안해진다. 고지대나 한랭지에서는 말초 혈관 수축 탓에 CGM 수치가 실제보다 낮게 나올 수 있으므로 혈당채혈기로 교차 확인하면 안전하다.
여행이 삶에 주는 활력은 건강한 혈당조절이 뒷받침될 때 더욱 빛난다. 여분의 인슐린을 챙길 때처럼 계획을 넉넉히 세우고, 현지에서도 혈당을 꾸준히 관리한다면 지구 반대편 낯선 곳에서도 당뇨병은 더 이상 짐이 아닌 든든한 여행 동반자가 되어 줄 것이다.